[기고 / 유진숙] 푸른 갈라테아와 나란히 걷는 길
해운대-청사포-송정 왕복
유진숙 프로필
* 시인 겸 수필가
* 저서 강아지풀 외 2권,
* 문인대사진 및 동인지 다수.
* 각종 문학상 다수

새벽의 잔영이 채 가시지 않은 서늘한 대기가 뺨을 스치는 시각, 여정의 채비를 단단히 하고 미포의 초입에서 첫걸음을 떼어 놓았다. 오늘의 여정은 해운대를 시발점 삼아 청사포의 늑골 같은 품을 거쳐 송정의 백사(白沙)까지, 그리고 다시 그 길을 역행하는 왕복 트레킹 코스다. 아득한 감청색 동해를 우현(右舷)에 두고 온전히 파도의 독백에 귀 기울이며 걷는, 오롯한 사색의 길이다.
아직 본격적인 인파의 소요(騷擾)가 당도하기 전, 해운대의 상흔 없는 바다는 고요하면서도 아침의 생동으로 충만했다. 해변의 끝자락, 미포에서 시작되는 그린레일웨이의 철길 자취로 접어들었다. 머리 위로는 오색의 스카이캡슐이 성근 걸음으로 허공을 수놓고, 발아래로는 유려하게 다듬어진 데크길이 마중을 나온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던질 때마다 가슴으로 밀려드는 대양의 파노라마와 저 멀리 아스라이 걸린 광안대교의 실루엣은 기시감 속에서도 늘 경이롭다. 여명에서 깨어난 햇살이 윤슬이 되어 수면 위에서 부서지는 잔영을 전경(前景) 삼아 걸으니, 이른 아침의 곤비함은 이내 청량한 해방감으로 변모해 간다.


달맞이재의 어스름한 터널을 통과하자, 한 폭의 수묵화처럼 호젓한 포구, 청사포가 은근한 자태를 드러냈다. 적(赤)과 백(白)의 쌍둥이 등대가 서로를 연모하듯 마주 선 풍경은 언제 보아도 다정하다. 해변열차가 철길을 가로지르는 찰나, 건널목에 멈춰 서면 푸른 해안선과 이국적인 열차, 그리고 빛바랜 어촌 마을의 정취가 직조해 내는 아련한 향수에 젖어 들게 된다. 시선이 머무는 모든 곳이 그대로 하나의 프레임이 되는 청사포의 미학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릿돌전망대의 서슬 퍼런 초입에 섰다. 투명한 유리 아래로 쉼 없이 소용돌이치는 심연을 굽어보니, 대자연의 위용에 절로 경외심이 일었다. 청사포의 고즈넉한 풍광을 가슴에 새긴 채, 다시 송정을 향해 여정을 재촉했다.
청사포를 지나 구덕포로 이어지는 한적한 길은 한결 더 원시적인 자연의 숨결을 뿜어냈다. 울창한 송림(松林) 사이로 간간이 불어오는 솔바람이 이마의 땀방울을 감미롭게 애무했다. 마침내 당도한 송정해수욕장은 앞서 지나온 해운대의 아취와는 또 다른 원초적인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서늘한 수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핑보드에 몸을 실은 채 파도를 희롱하는 청춘들의 역동성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넓게 펼쳐진 은빛 백사장과 거침없이 트인 수평선을 바라보며 시원한 음료로 타는 목을 축였다. 송정의 죽도정에 올라 소생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지금까지 가슴으로 걸어온 궤적을 소요(逍遙)했다. 이토록 깊은 길을 걸어왔구나, 하는 묵직한 성취감이 가슴을 채워왔다.
이제는 지나온 자취를 되짚어 돌아갈 시간이다. 왕복 여정의 묘미는 일방통행의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던 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 있다. 정오를 향해 가는 태양 아래 바다의 명도는 더욱 짙은 군청색으로 물들어 갔고, 정적을 깨우는 행인들의 활기찬 잔향이 아침의 여백을 메워 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의 청사포와 해운대는 새벽녘의 수줍음은 지워진 채, 한층 더 찬란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下肢)의 근육은 묵직한 피로를 호소했으나, 걸음마다 묻어나는 갯내음과 파도의 변주곡 덕분에 사색의 끈은 여전히 팽팽함을 유지했다.

출발지였던 미포의 초입으로 귀환하니 육신은 비록 고단했으나, 영혼만큼은 저 광막한 대양을 품은 듯 지극히 풍요로웠다. 해운대의 화려한 서사, 청사포의 서정적인 아리아, 그리고 송정의 활기찬 찬가가 삼중주를 이루는 길. 푸른 바다와 평행선을 그리며 점철되었던 오늘 아침의 궤적은, 건조한 일상 속에서도 문득문득 마음을 적셔줄 시린 위로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