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7-16(목)
 



유진숙 프로필

* 시인 겸 수필가

* 저서 강아지풀 외 2권,

* 문인대사진 및 동인지 다수.

* 각종 문학상 다수

 

KakaoTalk_20260526_085747826_05.jpg

 

언제나 익숙한 공간을 떠나는 일은 기분 좋은 설렘을 동반한다.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 양산을 출발해 남해고속도로를 길게 달리는 길,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이 싱그러운 초록으로 물들기 시작할 무렵 첫 번째 쉼터인 사천휴게소에 들렀다. 잠시 숨을 고르며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은 이번 여정의 향긋한 서막을 알리는 프롤로그와 같았다. 낯선 길 위에서 마시는 커피는 언제나 마음을 한 발짝 먼저 목적지로 데려다 놓는다.


다시 시동을 걸고 부지런히 달려 소설 《태백산맥》의 거대한 무대인 벌교를 지나쳤다. 차창을 조금 내리니 스쳐 가는 벌교의 공기는 어딘지 모르게 묵직했다. 그 안에는 삶의 치열함과 투박한 정겨움이 뒤섞인 갯내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


벌교를 뒤로하고 한반도의 시작이자 끝인 해남에 발을 디뎠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구릉지와 멀리서 일렁이는 푸른 바다는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드는 자연의 위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해남의 아름다운 풍경을 서둘러 눈에 담으며, 우리는 보배로운 섬 진도로 향했다.

 

붉은 진도대교를 건너 드디어 진도(珍島)에 진입했다. 마침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곧장 진도 상설전통시장으로 향했다. 식탁 가득 푸짐하게 차려진 달콤하고 매콤한 해물찜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니, 남도의 넉넉한 인심이 온몸의 세포를 깨우는 듯했다.

 

KakaoTalk_20260526_085747826_04.jpg


기분 좋게 배를 채운 후, 발걸음은 자연스레 진도 팽목항(기억항)으로 향했다. 노란 리본이 거센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는 그곳에 서자, 눈이 시리도록 잔잔한 바다와 달리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잠시 고개를 숙여 깊은 묵념을 올렸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아 한 줄의 메모를 남기며, 그날의 아픔을 마음 깊은 곳에 오래도록 새겨두었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말이 없었다.


KakaoTalk_20260526_085747826_01.jpg
▶ 유진숙 시인 / 수필가

 

이어 찾아간 명량해상케이블카는 전혀 다른 감정을 선물했다. 울돌목의 거센 회오리 바다 위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경험은 짜릿하면서도 경이로웠다. 이순신 장군의 고뇌와 위대한 승리의 역사가 숨 쉬는 바다를 보며 자연의 위엄을 온몸으로 느꼈다.


우수영 국민관광지 내의 명량대첩 해전사기념전시관과 명량해전공원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울돌목 스카이워크를 걸으며 발아래를 보니 좁은 해협을 통과하는 물살의 빠르기가 무려 11.5노트(초당 5.7m)에 달한다고 한다. 이 급물살이 바다 밑 암초에 부딪혀 우는 소리가 무려 8km 밖까지 들린다 하여 '울돌목'이라 불렸고, 이를 한자로 '바다가 운다'는 뜻의 명량(鳴梁)이라 칭했다 하니, 과연 이름에 걸맞은 장쾌한 기상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다시 해남 시내를 거쳐 나오는 길,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유명한 빵집에 들렀다. 지역 특산물인 달콤한 고구마빵들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손에 묵직하게 빵 봉지를 들고 나서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아이처럼 철없는 즐거움으로 가득 찬다.


진도와 해남의 강렬한 여정을 뒤로하고, 발걸음은 탐진강을 끼고 있는 장흥시장으로 이어졌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탐진강 물길 곁에서 열리는 이 시장은 여전히 활력이 넘쳐났다. 남도의 산과 바다, 들에서 난 온갖 풍성한 먹거리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상인들과 투박하지만 정겨운 흥정을 나누며 사람 사는 냄새를 물씬 맡았다. 장터의 따스한 여운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이곳의 특산물인 짭조름하고 고소한 곱창김을 한 품 안고 마지막 행선지인 광양으로 향했다.


행복했던 남도 유람의 피날레는 광양불고기 특화거리에서 장식했다. 얇게 썬 소고기에 달콤 짭조름한 양념을 갓 버무려 참숯불에 구워 먹는 광양불고기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살살 녹는 고기 한 점에, 이번 여행 동안 겹겹이 쌓인 아름다운 추억들이 고스란히 녹아내리는 듯했다. 미각으로 완성되는 여행의 기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법이다.


KakaoTalk_20260526_085747826_03.jpg

 

푸른 바다의 깊은 역사와 남도의 넉넉한 맛을 가득 품고 다시 양산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은 어느새 어둠이 짙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이미 또 다른 여정의 바람이 아련히 불고 있었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수필 기고 / 유진숙] '명량의 거센 숨결, 탐진강의 넉넉한 품을 걷다'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