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창열 시인/프로필
- 동국대 졸업, 특정직 국가공무원(3급) 퇴직
- 경기한국수필가협회 부회장 역임
- 『워낭소리의 추억』 등 수필집 3권, 시조집 2권 출간
- 글벗문학상, 석교시조문학상, 경기문학인대상 수상
- 문학 및 음악 유튜브 채널 『시, AI선율로 피어나다』 운영
- 대중가요 450곡 국내외 14개 음반사 발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면 역사는 눈을 감고, 민족은 길을 잃는다. 우리는 한겨울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피어나는 매화처럼, 고난을 이겨낸 역사를 가졌다. 그러나 그 역사 위에 피어난 이름 하나 — 『환단고기』. 그 이름 앞에서 많은 이들이 열광하고, 환호하며, 심지어 눈물을 흘린다. “이것이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위대함이요, 하늘이 내린 배달민족의 서사시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 멈추어 물어야 한다. 이 책이 과연 진실인가? 아니면, 진실을 가장한 신화의 독주인가?
이 책은 일제강점기 초, 계연수라는 인물이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다. 나라를 잃고 민족의 혼이 꺼져가던 시기, 정신적 위안이 필요했던 그 시절의 산물이다. 소설 임진록처럼 패배 속에서도 승리를 꿈꾸던 민초들의 판타지, 허구이지만 민족 자존의 갈망이 담긴 서사시 말이다. 그 자체로는 나무랄 일 없다. 문제는, 이 책을 진짜 역사책으로 믿는 데서 생긴다. 그 순간, 환상은 신화가 되고, 신화는 독주가 된다.
『환단고기』가 위서로 분류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원본은 존재하지 않고, 필사본만 전해진다. 그마저도 시대마다 내용이 다르고, 문체와 용어도 일관성이 없다. 고대에 나올 수 없는 20세기식 번역투와 인위적인 조어가 가득하고, 근대적 개념들이 고대 서술 속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 있다.
가장 흔히 지적되는 예가 환국의 영토다.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라는데, 이는 북극에서 남극까지가 모두 우리 땅이었다는 말과 같다. 지금도 한민족 전체 인구가 1억이 안 되는데, 당시 환국에는 1억 8천만 명이 살았다고 한다. 단군들이 평균 44년씩 재위했다는 것도 의심스럽다. 고대에 그토록 장수한 왕들이 줄줄이 있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신의 통치였다.
단군조선이 하나라와 은나라를 정벌했다고도 하는데, 중국의 정사와 시기를 비교해 보면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충돌한다. 그 시대가 고작 청동기 초입인데, 환단고기에는 조세제도, 감찰제, 구휼정책, 조선소, 신문고, 천거제, 심지어 세계박람회까지 있었다고 한다. 세계가 간신히 농경사회를 넘어설 무렵에, 이미 조선은 근대 행정국가를 운영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무리 민족 자존이 중요하다 해도, 이런 주장은 상상력의 범위를 넘어선다.
문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단군이 만든 ‘가림토 38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문자를 보여주는 유물이나 유적은 만주든 한반도든 단 하나도 없다. 그 흔한 목간 하나, 토기 조각 하나 없다. 역사란 말이 아니라, 흔적이 있어야 한다. 말뿐인 문자는 없었던 문자다.
또한 『환단고기』에는 광개토왕이 대마도를 정벌했고 일본 열도까지 지배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어디에도 없고, 일본 측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하지 못했을 이유가 없다. 기존의 정사 전체를 뒤엎는 수준인데,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사료는 아무것도 없다.
무엇보다 환단고기는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참고했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저본 사료들은 이름만 나오고, 정작 실물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어디에 보관돼 있었는지, 어떤 경로로 인용했는지도 불분명하다. “누가 말했다더라”, “어디에 있었다더라”는 식의 전언만 반복된다. 전근대 구술문학도 그보단 더 구조가 있다. 이런 형식은 역사서라기보다 괴담에 가깝다.
이쯤 되면 『환단고기』는 역사라기보다는 민족적 자부심을 부풀린 허구의 판타지다. 그렇다고 전부 부정하자는 건 아니다. 나라를 잃고 정신적으로 유린당하던 시기, 스스로에게 민족의 위엄을 되새기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그것을 현실의 역사와 혼동하는 순간, 민족의 정체성은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진다. 진짜 문제는 자부심이 아니라 착각이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를 직시할 때 가장 강하다. 아픈 역사, 부끄러운 순간, 찢긴 시간들까지도 기록하고 껴안을 줄 알아야 민족의 자존감이 생긴다. 자존심은 남과 비교하면서 생기는 허울이고, 자존감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생긴다. 역사는 거울이다. 진실을 담은 거울은 내 얼굴의 주름과 흉터를 다 비춰준다. 하지만 환상으로 칠해진 거울은 결코 나를 보여주지 않는다.
『환단고기』 속 민족은 상상 속에서 찬란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서야 할 자리는, 과장이 아니라 진실 위다. 신화는 위안이 될 수 있지만, 방향이 될 수는 없다. 역사의 뿌리는 상상력이 아니라 사실 위에 자란다. 그러니, 진짜 역사를 바로 보자. 그래야 민족도 바로 설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