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1-2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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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도세자'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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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창열 시인/프로필


- 동국대 졸업, 특정직 국가공무원(3급) 퇴직

- 경기한국수필가협회 부회장 역임

- 『워낭소리의 추억』 등 수필집 3권, 시조집 2권 출간

- 글벗문학상, 석교시조문학상, 경기문학인대상 수상

- 문학 및 음악 유튜브 채널 『시, AI선율로 피어나다』 운영

- 대중가요 450곡 국내외 14개 음반사 발매



뒤주 속에 갇혀 죽어간 왕세자의 참혹한 최후에 마음 아파하는 이들이 있다. 아버지가 어떻게 아들을 그렇게 죽일 수 있느냐며 분개한다.  철학자 도올 김용옥조차도 정조의 화성행궁 축조 기념강연에서 영조의 결정을 통렬히 질타하며 핏대를 세웠다. "저토록 잔인한 부정父情이 있을 수 있느냐"고.


사도세자는 단지 당쟁의 희생자였을까? 단지 영조의 냉정하고 권위적인 훈육이 만든 피해자였을까? 우리는 이 지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사도세자의 가장 가까운 이들조차 그를 말릴 수 없었는지, 왜 아내와 생모조차 그를 처벌해달라고 울부짖었는지를.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남긴 일기체 기록이다. 그녀는 사도세자의 아내로, 저간의 사정을 누구보다 속속들이 겪어 아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기록 속에서 사도세자의 비행을 솔직히 털어놓는다. 나인들을 닥치는 대로 겁탈하고, 비구니와 기생을 궁으로 불러 음란한 잔치를 벌였으며, 급기야는 자신의 거처를 무덤처럼 꾸며 관을 짜 넣고 스스로 그 안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옷을 입지 못하는 병에 걸려 하루에 열 벌의 옷을 태워버린 적이 있고, 시중 드는 궁녀들을 무자비하게 때리다 못해 급기야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사람의 목을 베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들고 방으로 들어와 혜경궁이 기함을 했다고. 그는 자신이 사랑하던 후궁 빙애가 간언하자 때려 죽였고, 그녀가 낳은 아이 은전군을 칼로 찔러 연못에 던졌는데 궁녀가 건져냈다. 내관 김한채는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살해당했고, 서경달은 물건을 늦게 가져왔다고 목이 날아갔다.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시녀조차 살아남지 못했다.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고, 그 분노는 아내와 어머니를 향하기도 했다.


급기야 그는 아버지인 영조를 죽이겠다고 두 차례나 칼을 들고 경희궁으로 향하려 했다. 더는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낀 아내 혜경궁이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에게 고했고, 영빈 이씨는 남편 영조에게 대죄를 청했다. 영조의 폐세자 반교문頒敎文과 박하원이 정조에게 지어올린 대천록待闡錄에 사도세자가 죽인 이들이 세 자리 숫자에 달한다는 구절이 있다. 


휘령전 앞마당, 뜨거운 여름날,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그러나 세자는 자결하지 않았다. 영조는 차마 칼을 들이대지 못했고, 뒤주를 가져오게 했다. 세자는 그렇게 뒤주 속에서 여드레를 버티다가 숨졌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의 죄상을 지운 문서를 정리했고, 화성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며 묘호를 '장헌'으로 바꾸었다. 그는 자신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세월이 흐른 뒤 아들의 기록과는 다르게 남편의 실상을 그대로 남겼다. 그녀는 말했다. "요즘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당파들이 서로 탓을 하지만, 그렇지 않다"라고.


우리는 역사를 감정으로 쓰지 않아야 한다. 진실은 냉정하지만, 그 위에서만 올바른 판단이 가능하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아들이 인간의 궤도를 이탈해버린 순간, 조선이 택한 마지막 선택’의 이야기다.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이는 단지 피해자가 아니라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무서운 가해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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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창열 선생 기고] 역사 바로 알기 시리즈 3탄-왕세자, 그리고 연쇄살인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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