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늘 승자의 기록이다. 영웅이 만들어지는 순간, 누군가는 악역이 된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치르던 가장 절박한 시절, 이순신이라는 이름은 구국의 아이콘으로 남았고, 그의 그림자 속에 사라진 이름이 있었다. 원균, 그는 정말 후대가 말하는 것처럼 졸장부이자 겁쟁이였을까?
이순신은 분명 영웅이었다. 23전 23승이라는 전설적 기록은 해전사에 유례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영웅을 빛나게 하기 위해, 굳이 누군가를 덜어내야 했는가 하는 점이다. 후대의 해석은 늘 단순화를 좋아했고, 이순신의 고결한 인품과 전술적 탁월함을 부각하기 위해 원균을 무능한 질투심의 화신으로 만들어냈다. “이순신을 끌어내리려다 결국 나라를 말아먹은 자”, 원균은 그렇게 하나의 서사적 도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실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는 아니다. 임진왜란 이후 공을 논해 책록된 선무공신 1등 3인 중 한 명이 원균이었다. 단순히 선조의 비호나 정치적 뒷배만으로 그러한 책록이 가능했을까? 권율, 이순신과 나란히 이름을 올린 이 인물을 그저 졸장이라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원균에 대한 내 시선을 바꾸게 된 것은 대학 시절의 경험이었다. 그때 한 사학과 선배가 쓴 논문을 읽었고, 그 글은 이후 나의 관점을 바꿔놓았다. 훗날 그 선배는 지방의 한 국립대학 박물관장이 되었는데, 그 논문은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이순신 중심으로 구성된 서사 구조의 빈틈을 짚어내고 있었다.
비판의 가장 큰 대목은 바로 부산포 자침 사건이다. 역사 강사 황현필은 유튜브 강의에서, 원균이 싸워보지도 않고 군선 70척을 자침시켰다며 핏대를 올렸다. 그러나 전쟁 초기 조선 수군의 구조를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그렇게 쉽게 비난할 수는 없다. 경상우수영은 관할 지역만도 광범위했고, 70여 척의 판옥선은 단일 항구에 모여 있지 않았다. 병사들 또한 상시 배치된 상비군이 아니라 교대로 근무하는 체제였다. 침공 당일, 원균은 전함을 모을 시간조차 없이 일본군의 공세에 직면했으며, 함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 이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침이라는 군사적 선택을 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실제로 조정도 이 사건 하나만으로 원균을 파직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군령을 어기고, 고의로 전선을 자침시킨 무책임한 자였다면, 곧바로 처벌이 내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후에도 계속 기용되었고, 이순신과 함께 연합함대를 이루어 옥포, 당포, 한산도 해전에서 싸웠다. 옥포해전의 선봉 역시 원균이었다.
칠천량 해전의 참패는 또 다른 화살을 원균에게 돌리는 이유다. 조선 수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였던 이 전투는, 분명 지휘관 원균에게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우리가 간과하는 중대한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 조정은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을 통제사에 임명한 뒤, 이길 수 없는 싸움, 즉 부산포로의 무리한 공격을 강요했다. 이에 원균은 거듭 출정을 거부했고, 결국 도원수 권율에게 군사들 앞에서 곤장을 맞는 수모를 당한 뒤, 굴복했다.
당시 일본은 정예 수군을 부산에 집결시켰고, 시마즈 요시히로 같은 노련한 장수까지 출전했다. 지형상 조선 수군이 불리한 넓은 외해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그나마도 육군의 지원은 없었고, 병력의 절반 이상은 병력 보충을 위해 새로 징집된 신병들이었다. 결국 원균은 사지에 내몰린 채 전투를 벌였고, 그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단순히 “도망치다 죽은 자”라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된 것 역시, 단순히 원균의 모함 때문이었다기보다는 복합적인 원인이 얽혀 있었다. 왕의 명령을 수차례 거부한 일, 왜군 동태에 대한 과장된 보고, 왕자의 호출을 거절한 일 등이 누적된 결과였다. 당시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조차 이순신이 하옥될 때 적극적인 변론을 하지 않았다는 점은, 조정 내부에서도 이순신의 처신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훗날 이순신은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의 승리로 영웅이 되었고, 그의 명성은 역사적으로 정당하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원균은 단 한 번의 패배로 모든 업적이 부정당했고, 비난과 조롱 속에 고정된 인물이 되어버렸다.
원균은 완벽한 장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능하고 사리사욕에 눈 먼 자로만 평가받기엔 지나치게 불운했고, 시대의 희생양이었던 측면이 있다. 그는 초기에 수군 재건에 기여했고, 끝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정유재란 시기, 명군과 왜군이 대치하는 가운데 조선 수군의 전멸은 조정과 지휘계통의 혼란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책임을 한 사람에게 모두 덮어씌우는 것은, 마치 패배한 전쟁에서 장수 하나만을 마녀사냥하듯 처리하는 것과 다름없다.
해방 이후 이순신을 성웅으로 추앙하는 과정에서, 원균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악화되었다. 국민정신을 결집시키기 위한 영웅 만들기의 이면에는 누군가를 매도해야 했던 흑백논리가 작용했고, 원균은 그 희생양이 되었다. 마치 현대의 인터넷 댓글들처럼, 원균의 이름에는 지금도 "겁쟁이", "졸장"이라는 조롱이 쉽게 따라붙는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감정의 편에만 서서는 안 된다. 실록 속에서, 징비록 속에서, 당시의 병력 동원 체계와 작전 환경, 장수들 간의 인간적 갈등까지 종합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원균이 단순한 졸장이라면, 왜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을까? 왜 그가 전사한 뒤에도 조정은 그를 영웅이라 칭송했을까? 그 답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기록과, 외면해온 맥락 속에 있다.
이순신은 영웅이다. 그러나 그 영웅의 그림자를 무턱대고 악역이라 몰아붙이는 것, 그것은 정당한 역사 인식이 아니다. 원균 또한 당대의 수많은 장수들처럼, 시대를 견디다 스러진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그를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 조롱만 한다면, 우리 역시 역사를 절반만 읽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