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와 봉오동. 이 두 전투는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투쟁의 상징으로, 오랜 세월 동안 민족의 자부심으로 추앙받아 왔다. 교과서에는 '대첩(大捷)'이라 쓰여 있고, 기념관과 추모비는 독립군의 혁혁한 승리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영광 뒤에 숨겨진 수치는 우리의 기억보다 조용하고, 때로는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이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단 4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같은 해 10월의 청산리 전투에서는 일본군 1,200여 명을 섬멸하고 독립군은 사상자 150명 내외라는 '10전 10승'의 기록도 전해진다. 임시정부의 공식 발표, 그리고 박은식·이범석 같은 당대 인물들의 회고 속에 이 승전보는 한 편의 서사시처럼 남아 있다.
하지만 일본군 기록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봉오동 전투에 직접 참여한 야스카와 추격대가 작성한 전투상보에 따르면, 일본군은 병사 1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 청산리 전투에 대해서도, 일본 방위대 교수 사사키 하루다카는 『조선전쟁 전사로서의 한국독립운동의 연구』에서 일본군 피해가 전사 11명, 부상자 24명이라고 밝혔다. 전과 차이는 수십 배, 아니 수백 배에 달한다.
과연 이 괴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1920년대 만주벌판의 독립군 현실을 들여다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1921년 장백현에서 김홍일이 목격한 독립군 부대는 병력 255명 중 50명만 전투 경험이 있었고, 소총은 21정, 권총은 3자루에 불과했다. 병사 12명당 총 한 자루꼴. 이처럼 무기와 탄약, 식량과 피복조차 부족한 ‘맨손의 군대’가 대포와 항공기로 무장한 정규 일본군을 압도했다는 말은 논리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쉽게 수긍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는 순간, 우리는 차가운 현실에 직면한다. “역사 왜곡이다.” “친일파다.” “토착 왜구다.” 이러한 비난은 생각보다 쉽게, 그리고 거칠게 날아온다. 마치 '민족의 자존심'이라는 말 한마디면 모든 이성적 문제제기는 금단의 영역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감정은 진실을 대신할 수 없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은 과장된 숫자가 아니라, 그 속에서도 싸울 수밖에 없었던 현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던 정신이다.
실제로 무장 독립투쟁가 김학철은 “전과는 적어도 300배 이상 과장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열에 아홉 번은 졌고, 겨우 이겼다고 해도 일본군 서너 명 사살에 그쳤다”고 회고한다. 그의 말은 『월간참여사회』 2001년 9월호 안경환 교수의 병상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단언한다. “우리의 항일 무장투쟁은 ‘대첩’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정신의 싸움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과장된 전과를 그대로 두는 것이 진정한 애국인가? 아니면, 아픈 진실일지라도 마주하고, 그 속에서 진짜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더 깊은 존경을 전하는 길은 아닐까?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홍범도 평전에서 “지리적 이점과 독립군의 사기가 승리의 원동력이었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했지만, 신효승(동북아역사재단)은 “청산리 전투의 전과를 확인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장세윤 역시 “우리 독립군도 일본 못지않은 피해를 본 것으로 보아야 하며, 청산리 전투는 대첩이 아니라 무승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2005).
이처럼 사실에 기반한 다양한 연구들이 존재함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숭고한 신화’에 집착한다. 그러나 기억하자. 신화는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부족할 때 만들어진다. 이제는 그 신화를 벗겨내고, 눈보라 속에서 떨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그들의 진짜 용기에 주목할 때다.
우리가 진정 기려야 할 것은 숫자가 아니다. 시대를 거슬러 끝내 고개를 들고 싸웠던 이름 없는 병사들의 숨결이다. 승전보가 아니어도 좋다. 그 싸움이 부풀려진 신화일지라도, 그 안의 절박함은 진짜였다. 그들이 싸운 건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서'였으니까.
